어느 날(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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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일기 여섯
01. 시기가 시기인만큼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인사를 하자. 건강한가요, 다들. 마스크는 넉넉히 갖고 계신가요... 02. 분명 저번 글에서는 자주 와야지, 하고 다짐을 했는데 또 근 2달 만에 이 페이지를 열었다. 여기 들어오면 시간이 빠르다는 걸 새삼 느낀다.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멈춰있고 나는 다짐이 취미인 사람. 03. 내 문장을 읽는 걸 좋아한다. 인스타에 게시물이 그렇게 그득그득 쌓여있는데 좀처럼 지우지 못하는 이유이다. 글을 잘쓰는 편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자꾸 쓰는 이유는, 나중에 글을 다시 읽었을 때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많다. 대게 가볍고 하릴없는 생각들이지만, 그래서인지 어떤 생각들은 쉽게 까먹는다. 읽다보..
2020.02.29 -
자취일기 다섯
002번이 매우 길고,전체적으로 좀 깁니다.놀라지 마세요. 01두 번째 종강을 했다.아, 너무 힘들었다.과제는 과제대로 몰아치지, 시험날짜는 다가오지.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는 말이 제격이었다. 간신히 과제가 잦아들고, 시험공부를 시작할 즈음엔기력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시험공부를 하는데도,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나무판자를 열심히 못질을 하는 기분이었다.안 그래도 공부를 할 때면 밑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는데,이번엔 밑이 깨지다 못해 아예 부서졌다. 부서졌어. 그래서 성적에 대한 기대는 진즉에 접었다. 그런데 성적에 대한 기대를 진즉에 접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나와 같은 과제를 했거나 혹은 나보다 더 많은 과제를 했는데도열심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사람들 말이다. 부러웠..
2019.12.24 -
자취일기 넷
01 중간고사를 봤다. 언제는 내가 만족할 만큼 시험을 잘 본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니까 이번 결과도 이해하기가 쉬웠다. 02 잊었던 것들을 하나둘 챙기기 시작했다. 모부님과의 관계, 동생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어떤 부분이 어떻게 틀어져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는가에 대해 하나 둘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저마다 다른 답들을 내놓았고, 때때로 누군가에겐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길이기 때문에. 03 그래서인지 자꾸만 거꾸로 가고 싶다. 앞을 걷고 있는데, 왠지 멈춰있는 것 같고. 계절이 바뀌는 것보다 바뀌는 게 더딘 것 같고. 모든 날이 그랬지만 이렇게 글로 적을 때면 지독히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04 근래에는 뜬금없이 내 ..
2019.10.30 -
자취일기 셋
01 종강했다고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개강한 지 벌써 3주째다. 이곳에 돌아오고 난 후의 생활을 가만히 되짚어보았다. 조용한 회색빛이 돌며, 밤엔 주황색 불빛이 조용히 들어차는 방 안엔 끼익-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자그마한 선풍기, 다음 날 비가 올 거라고 알리기라도 하듯 쭈굴거리기 시작하는 벽,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지고 있는 연회색빛 옷장, 축축함을 조금이라도 이겨내보려 구매했던 자그마한 제습기, 한 주의 시간표를 그려 붙여놓은 냉장고, 엄마 취향이 가득 묻어있는 딸기우유색 커피포트, 아빠 취향으로 사다준 자그마한 인형들. 소소하다면 소소하고, 보잘것없다면 보잘것없는 것들. 나랑 제법 닮아있었다. 이 방을 처음 계약했을 때, 내 방이 생겨서 정말 기뻤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쭉 동..
2019.09.19 -
자취일기 둘
01 5월 21일에 첫 글을 작성했는데, 벌써 7월이다. '벌써'라는 단어가 퍽 잘 어울린다. 처음 종강이란 걸 했다. 빨리 종강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요령이 생긴 것도 같다. 하지만 종강은 운이다. 02 " 어떻게 지내? " 라는 말을 꽤 어려워하는 편이다. 상대의 안부를 묻는 일이란,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정의하는 계기이기도 하며, 동시에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상태의 방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물어오는 안부 문자들이 참 고맙기도 하고,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순전히 내 생각에서 비롯되어 내게 짊어지는 무게인지라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해하기도 뭐한데. 생각의 틀을 바꾸면 쉽게 해결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틀이라는 게 한번 굳혀진 비누처..
2019.07.03 -
자취일기 하나
01 20일은 성년의 날이었다. 20년 인생에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었다. 10시쯤이었나, 친구가 급하게 나를 깨웠다. " 야! 일어나봐! 어머님 오셨어! " 엄마아빠가 성년의 날이라고 아침부터 차를 몰고 서울까지 올라왔더라. 전날까지 학술답사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하고 늦게까지 넷플릭스를 보다 자버려서 엄청 비몽사몽한 상태로 일어나 정신없이 문을 열어줬다. 나도 몰랐던 내가 성년이 되는 날. 삶에 치여 살다보면 특별한 날은 쉽게 잊혀지고 만다고들 하던데.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고들 하던데. 그런 이야기들이 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02 차를 타고 올 때도 있지만, 보통 우리 엄마아빠는 기차를 통해 서울로 온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아빠를 기차 밖에서 물끄러미 쳐다본다. 기..
2019.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