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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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일기 열둘
🎧너의 바다 - 호피폴라 00 여름의 빌라 _ 백수린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12) …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p.17) … "언니, 아직도 그 사람한테 연락해?" , "응, 나 사실 지난주에도 또 걔한테 전화했다. 바보 같지?" 지금도 나는 이해..
2021.01.24 -
자취일기 열하나
🎧불면증 - 에피톤프로젝트(feat.윤하) 00보건교사 안은영 (p.47) _ 정세랑… 격하게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죽음도 있는가 하면 비누장미같이 오래 거기 있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시선으로부터 (p.281) _ 정세랑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점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01마지막 자취일기 게시물이 7월이더라.. 양심도 없지.나에게 변명을 하자면, 코로뭐 때..
2020.12.17 -
자취일기 열
🎧 Close - 하현상 00 다소 낮음 _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2019) 중 … 장우는 새 곡을 쓰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2집에 수록할 곡들이었다. 곡이 완성되면 보리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보리는 장우의 기타 반주만 들으면 꼬리를 치면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가끔 고개를 쭉 빼고 늑대처럼 울부짖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장우와 눈을 마주쳤다. 보리가 솜사탕처럼 동그란 얼굴을 하고서는 장우를 쳐다보고 헥헥거릴 때면 장우는 한없이 벅차올랐다. 말 못하는 짐승이 말 대신 보내는 그 신뢰의 눈빛을, 장우는 좋아했다. … 보리는 수술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장우와 마주쳤다. 옅은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였다. "선생님, 보리 아직 안 죽었어요." 수의사가 대답했다...
2020.07.21 -
자취일기 아홉
00 음복_강화길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그런데 말이야. 과연 그걸 선택이라고 말할 수..
2020.04.14 -
자취일기 여덟
https://youtu.be/PUWlgR07Xao 00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_김초엽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남미에, 서부 미국에, 인도에, 모두 흩어져서 살겠지.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 나는 말했어. 당신의 마지막 연인을 위해 당..
2020.03.17 -
자취일기 일곱
00 오늘은 오래간만에 집 밖을 나가보기로 했다. 날씨가 하도 좋다길래. 홈플러스에 가려고 카트를 챙겼다. (집 앞 마트로 장을 보러 갈 땐 장바구니를 챙긴다.) 홈플러스에선 평소에 미뤄뒀던 큼지막한 것들 위주로 구매하기 때문이었다. 카트가 내 키에 비해 좀 짧아서 불편하지만, 무거운 것보단 훨씬 나았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커피도 한잔 손에 들었다. 막상 홈플러스에 가니 오늘이 휴무일이더라. 원주는 수요일이 휴무일이라서, 당연히 수요일인 줄 알았다. 내가 알아보고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할 수 없이 집 앞 마트에 들러 장을 봐야 했다. 집 앞 마트는 좁고, 4시 - 6시쯤엔 굉장히 붐벼서 발 디디기도 힘든데 말이다. 그런데 하필 나는 카트를 끌고 있었고, 커피 때문에 손도 없었다. 카트는 짧아서 끌고..
2020.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