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일기 여섯

2020. 2. 29. 20:03어느 날

 

 

 

01.

시기가 시기인만큼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인사를 하자.

건강한가요, 다들.

마스크는 넉넉히 갖고 계신가요...

 

 

02.

분명 저번 글에서는 자주 와야지, 하고 다짐을 했는데

또 근 2달 만에 이 페이지를 열었다.

여기 들어오면 시간이 빠르다는 걸 새삼 느낀다.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멈춰있고

나는 다짐이 취미인 사람.

 

 

03.

내 문장을 읽는 걸 좋아한다.

인스타에 게시물이 그렇게 그득그득 쌓여있는데 좀처럼 지우지 못하는 이유이다.

 

글을 잘쓰는 편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자꾸 쓰는 이유는, 나중에 글을 다시 읽었을 때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많다.

대게 가볍고 하릴없는 생각들이지만,

그래서인지 어떤 생각들은 쉽게 까먹는다.

 

읽다보면 내가 쓴 글인데도 이따금 내가 쓴 것 같지 않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 글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쓴 글이 맞다고 확신한다.

 

내 글에 한해선 다양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04.

옷을 좋아한다. 

그런데 잘 입지는 못한다.

꾸준히 노력하는 성격이 아닌 탓일까,

요즘엔 당최 내 스타일을 모르겠다.

중학교 땐 빈티지를 너무 좋아했다. 

산타클로스가 입을법한 바지도 샀었고, 90년대 서부영화에서나 볼법한 청 멜빵바지도 샀었다. 

몇 번 쓰진 못했지만 그럴듯한 페도라도 구매했었다.
그때는 색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땐 교복이 지겨워서 교복 위에 이것저것 껴입는 걸 좋아했다. 

막 대담하게 옷을 입지는 못했다. 그냥 딱 내가 좋을 만큼만 입었다. 
굳이 브랜드 옷을 입지 않아도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이젠 교복이 없다.

둘러보면 볼수록 너무 많은 색들이, 스타일이, 사람들이 눈에 담긴다.

 

내가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그것들에서 또 다른 나를 찾았을 텐데,

요즘엔 자꾸 그것들을 따라가려고 한다.

 

그게 좋으니까 따라가고 싶은 건 당연한 건데, 따라만 가다 보니 자꾸만 나를 잊는다.

분명 따라가다 보면 개성이 생길 줄 알았는데.

이젠 '내가 무슨 색을 좋아했더라, 내가 이 옷을 왜 샀더라, 어떻게 입으려고 했더라?'

하고 자꾸 나한테 되묻는다.

 

더불어 너무 많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내가 보인다.

" 이렇게 입으면 이상할까? "

예전엔 '좀 이상하면 어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했는데.

 

쓰던 색 조합 외에 색 조합은 나를 쓸데없이 튀게 만드는 것 같았고,

입던 옷 조합 외에 레이어드는 불편하게만 보이기 시작했다.

 

어울림에 대한 무지가 나를 이렇게 괴롭힐 줄 몰랐다.

이제는 옷 입는 게 즐겁지가 않다.

 

 

05.

엄마와 다퉜다.

 

근 몇 년 만에 다툰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온전히 내 의견을 전달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 거창한 이유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

난데없이 본가에 있는 만화책을 모조리 버리겠다고 선포한 탓에 싸움이 났는데, 

풀면서 이유를 들어보니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만 사모으고 있는 동생이 답답해서 그랬단다.

 

동생이 언니도 지 돈으로 만화책 잔뜩 샀는데, 왜 자기돈을 자기 맘대로 못쓰게 하느냐고

늘 그렇듯 나를 철저히 자기 방어에 이용한 걸로 보였다.

 

엄마는 그 답답함과 화를 온전히 나에게 쏟아내고자 한 것 같았다. 만화책을 구매한 게 자기한테 "비참했다"고 까지 말하면서.

엄마의 비참함엔 미안하지만 나는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 만화책들은 내가 상을 받고 부상으로 탄 상품권이나, 한두 푼 안 쓰고 아낀 용돈으로 구매했을뿐더러 

동생처럼 한 번에 전권을 구매한 것도 아니었고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권 구매해 6-7년가량을 모은 거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건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가장 화가 낫던 건 내가 좋아했고, 좋아하는 것들을 엄마 마음대로 버리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날 세워서 엄마에게 말했다. 

내가 만화책 산 것으로 엄마가 비참하게까지 느끼게 할 거였으면 내가 취미를 갖지 말걸 그랬다고.

취미생활 안 하고, 그냥 얌전히 공부나 하고 살겠다고.

엄마 비참하게까지 하면서 취미를 갖고 싶어 하면, 내가 나쁜 딸인 거 아니겠냐고.

 

엄마는 365일 잠잠하다가 하루 성냈다고 그거 하나 못 들어주는 자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그거 하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모지리 애다. 무조건 이해해줄 거라고 믿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대부분 솔직히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되는 게 하나 있다면,

돈이 없어서 평생 손에 쥐어본 게 몇 안돼서 그런지 좋아하는 게 생기면 뭐든 갖고 싶어 진다고 말한 것.

 

틀린 얘기를 한 것 같아서 후회가 된다.

나는 생각보다 쥐고 있는 게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틀린 이야기. 

 

 

06.

나는 맥시멀 리스트다.

모자란 것보단 많은 게 좋다고,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처음 집에 이사 왔을 때는 집이 참 멀끔했는데,

이젠 짐이 생기면 어디다 둬야 할지 수납장을 바라보며 한참 고민해야 겨우 공간이 나온다.

 

저장강박증이라는 말도 있더라.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저장강박증'

 

아마 우리 가족 모두가 저장강박증일 것이다. 마치 다 못 먹더라도 볼 한가득 해바라기씨를 저장하는 햄스터들 같다.

다 쓰지 못할 걸 알면서도 여기저기서 얻어다 온 것들, 받아온 것들을 집구석 구석에 숨겨둔다.

그런 집구석이 싫어서 집 나오면 '정-말 깔끔히 살아야지.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지.' 했는데...

천성이 맥시멀 리스트인 걸까. 옷 하나를 버리더라도 이틀을 고민해야 겨우 결심이 선다.

 

한 번은 학교에 갔다가 빨주노초 파란색의 플로피디스크를 봤다.

요즘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고, 버리는 것 같길래 몇 개 가져왔는데

윤서한테 이야기했더니 "그걸 왜 주워오냐" 고 꾸중을 들었다.

한껏 주눅이 들어서 "언젠가 빈티지하게 장식하는 데 쓸 수 있지 않을까..?" 했더니

그게 언제냐고 묻더라. 할 말이 없었다. 빈티지 장식은 내 인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니까...

근데 아직 못 버렸다. 버리는 걸 까먹었다. 오늘은 꼭...^^

 

 

07.

특정한 주제도 없이 주야장천 내 얘기만 늘어놓는 이 글을 한 줄이라도 읽어주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댓글도 잘 보고 있고, 디엠도 잘 보고 있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또 글을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들 건강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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