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일기 다섯

2019. 12. 24. 04:03어느 날

 

 

달이 뜨면 전화를 주시는 게 맞습니다

 

00

2번이 매우 길고,

전체적으로 좀 깁니다.

놀라지 마세요.

 

 

01

두 번째 종강을 했다.

아, 너무 힘들었다.

과제는 과제대로 몰아치지, 시험날짜는 다가오지.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는 말이 제격이었다.

 

간신히 과제가 잦아들고, 시험공부를 시작할 즈음엔

기력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시험공부를 하는데도,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나무판자를 열심히 못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공부를 할 때면 밑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는데,

이번엔 밑이 깨지다 못해 아예 부서졌다. 부서졌어.

 

그래서 성적에 대한 기대는 진즉에 접었다.

 

그런데 성적에 대한 기대를 진즉에 접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나와 같은 과제를 했거나 혹은 나보다 더 많은 과제를 했는데도

열심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사람들 말이다.

 

부러웠다.

나는 혹여 일부로 내가 힘들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를 의심하기를 수십번.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질 않았고,

나는 그냥 이번에도 나를 깎아내리기로 했다.

그게 쉬우니까,

그냥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게

내가 이후에 결과를 받아들일 때도 수월할 테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게 꽤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나 보다.

성적을 보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면 말이다.

 

 

02

「나만 잘되게 해 주세요」 강보라 지음

 

 「나만 잘되게 해 주세요」 란 책을 읽고 있다. 나는 다독도 아니고, 정독도 아니고, 그저 적독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시험 기간만 되면 그 기질이 유난히 빛난다. 저번 달에 그 기질이 반짝여 쌓아 둔 책 중 한 권이다. 학교 앞에 '갑을문고'란 서점이 있는데, 책 위에 작은 포스트잇으로 책의 내용이나 글귀, 책을 읽고 난 간단한 서평을 남겨두는 서점이다. 그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기도 하다. 나는 「나만 잘되게 해 주세요」 이런 식의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를 위한 웅앵웅,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등...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듯한 제목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요즘 유행하는 제목짓기라지만... 내용도 다 비슷해서 그런지 이젠 저런 식의 제목만 봐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질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첫인상도 그닥 좋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읽으면서도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고 있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책에 표지엔, "자존과 관종의 감정 사회학"이라고 쓰여 있었다. 찍어낸 양 비슷한 제목과 자존, 감정, 관종이라는 단어의 콜라보... 정말 싫었다. 이 책은 안 봐도 유튜브다, 하고 넘기려 했었다. 의외로 내 발목을 붙잡은 건 서점에서 남겨준 서평 포스트잇이었다. '덕질의 시대' 이 다섯 단어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근래 한창 궁금해하고 있던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최근 '덕질'을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입덕에는 부정기가 있기 마련이고, 나 역시 입덕 부정기를 겪었다. 입덕 부정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덕질을 시작하기 앞서, 내가 정말 이 사람 혹은 이 장르를 좋아하는 게 맞나? 여기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지당한가? 이 사람 혹은 이 장르에 어디가 나의 구미를 자극했나? 고민하는 시기이며 아니야, 나는 그냥 이 사람의 목소리, 얼굴, 노래가 좋은 거지. 이 사람에게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할 정도로 좋은 건 아냐, 하면서도 당연하게 핸드폰의 배경화면을 그 사람으로 바꾸고 있는 시기 이도 하다.

 연예인을 덕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몇몇 극성팬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에게는 '팬'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극성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을 견뎌야 하는 일이며, 팬이라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극히 적고, 또한 나에게 돌아온다고 하여도 그것이 내 연예인의 진심인지 알 턱이 없는 그 이상한 관계에 나는 내 돈과 시간이란 귀중한 가치를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난 입덕에 앞서 내 연예인의 진심을 모른다는 것이 특히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장장 4년에 가까운 시간을 한 아이돌에게 바쳤다. 지금에 와서 돌아온 건 그의 추문뿐이다. 나는 이제 어디 가서 그의 팬이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게 되었다. 그래서 또 이런 결말이 툭 튀어나올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다 문득 내 전 아이돌에게 사건이 터졌을 때, 다시는 덕질을 하지 않으리라. 하고 다짐했던 내가 왜 결국 입덕의 길을 걷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급히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인터넷에선, '그 연예인이 이루어내는 성취를 보며 자신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웅앵웅'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그에 관련한 논문은 찾지 못했고. 덕질을 하게 되는 이유가 내 자아를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연예인의 성취를 통해 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나의 또 다른 성취 욕구를 찾는 과정이라는데, 속이 쉬이 편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봤다. 계속해서 추문을 일으키고 사고만 치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덤의 심리는 무엇인가. 혹시 내가 파게 될 아이돌이 사고를 치게 되었을 때, 내가 그 아이돌을 못 놓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책을 읽다가, 성공한 연예인들이 왜 사고를 일으키는지는 대충 맥락을 읽을 수 있었다. 문유석 판사님의 판사 유감이란 책이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공인의 위치에 있지 않은 우리는 행복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도, 자신만의 위치에서 그것을 해석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주 조용히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아하는 차를 마시는 시간이라던가, 다이어리를 쓰며 평소 붙이고 싶었던 스티커를 붙이는 순간이라던가. 그런 작은 순간들이나 작은 것들을 행복으로 느끼는 것이 가능하단 거다. 하지만 이 행복이란 게 욕심과도 비슷해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더 큰 행복을 바라게 된다. 작은 자전거가 자동차가 되고, 자동차가 비행기가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높은 위치에 있는 공인들일 수록 이 커다란 행복들을 쉽게 손에 쥐게 되고, 나중에는 커다란 행복들조차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행복이 마치 마약처럼 더 커다랗고 자극적이지 않으면 행복으로써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색다르다는 판단하에 불법에 손을 대게 된다.

 내가 책을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늘 "아니, 그렇게 돈이 많은데 굳이 왜 대마를 해?" 하고 울부짖었을 때의 궁금증을 해결하기엔 너무도 좋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아, 그럼 내 아이돌이 이런 길에 뛰어들어도 최소 이해는 할 수 있겠네. 하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왜 덕질을 하게 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찾아봤었는데, 딱 눈에 드는 게 없던 찰나에 이 책이 사람들이 왜 덕질을 하게 되는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길래 궁금해져서 구매하게 되었다.

 궁금했던 '덕질의 시대'에 대한 부분을 가장 먼저 읽었다. 작가님이 덕질을 굉장히 좋게 평가해 주신 것을 알 수 있었다. 덕질을 시작하는 순간 사람들은 인터넷 속에서 새로운 사회관계를 시작할 수 있고, 더군다나 자신들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기에 스스로가 성장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덕질이란 주로 집단으로 이루어져, 집단 문화 내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익히며 집단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데에도 크게 일조할 수 있어 요즈음 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요즈음 덕질을 하면서, 같은 피드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덕력을 검증하고, 비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그 부분에 관해서도 서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 간의 동료의식과 경쟁의식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덕력이 검증될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무언가)에 가까워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는데, 사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던 거라 알 수 없었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팬이 광신도(fanatic)이란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은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래서 팬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던 초기에는 팬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도 많았다고. 그러나 지식인층 중에 팬(덕후)들이 많아 그 시선을 바꾸고자 꾸준히 노력했고, 덕후들의 긍정적인 집단 영향(기부, 공론화 등)덕에 그 시선이 이제와서는 많이 좋아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덕질을 시작하는 데 가장 좋은 영향을 주었던 내용은,

 

그 어느 때보다 덕질이 부상하고 그 힘이 인정받는 건, 개인의 자기표현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예전부터 개인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쓸모가 있음을 증명하도록 요구받아왔다. (중략) 자신에 대한 존재 증명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따르는 것을 통해, 즉 즐거운 감정을 한껏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어떻게 보면 개인에게 자신의 존재 증명이 더는 사회의 거대 담론과 공명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발현할 때 비로소 획득할 수 있는 것임을 알려준다. 이 시대의 덕질은 감정을 기반으로 개인의 자기 증명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덕질은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관찰하고 그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과 다름없다.-「나만 잘되게 해 주세요」 덕질의 시대

 

사실 아직 아이돌 덕질이 그리 좋게 평가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네들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엄마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근데 왜 덕질을 하느냐, 라고 물으면 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몰랐기 때문에. 그런데 저 문장이 그 답을 대신해주는 것 같다. 

 

나는 덕질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간다.

 

처음 시작한 덕질에선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재능은 없지만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지금 내가 옷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내가 좋아하던 아이돌이 옷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둘 잊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맘 깊숙이 묻어두고 있었다. 이는 밑도끝도 없이 덕질을 함으로써 내 자아를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내 감정이 향하는 곳을 내가 앎으로써 내가 일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간다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덕질을 다시 시작하며, ‘ 내가 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유가 새로이 있겠거니. 나를 찾아가고,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를 만나게 되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라는 것을 나의 성취로써 이뤄내지 않아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테니까.

 

 

03

어우,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 신이 났나 보다.

주체 없이 길어지는 문장이 나도 좀 낯설다.

 

고등학교 때였나.

그런 글을 봤었다.

 

"대학교 공감! 나랑 안 맞는 사람들한테 시간, 돈 안 쓰고 싶음!"

ㄴ222

ㄴ333

ㄴ좋아요 오백 개

 

사실 고등학교 땐 진짜 이해 못했다.

' 아니, 안 맞는 사람이라도 시간 좀 쓸 수 있지. 안 맞는 사람이라도 배워 가는 게 있을 게 아냐. '

하고 생각했었다.

 

뭐 이제 겨우 1년 되었지만, 저게 무슨 말인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나만의 테두리가 짙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단단하던 껍질이 더욱 견고히 쌓여가고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대화들 속에서

나는 꾸준히 정의되기도 하고, 고착화되기도 한다.

정의되는 삶은 늘 겪어왔고, 나 또한 그러고 살고 있으니 아무렇지 않은데

고착화되어가는 삶은 안정감이 든다.

내가 만들어놓은 테두리에서 편안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드는거다.

게다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란 게 거창한게 아니다.
그건 수년간 축적된 나만의 빅데이터가 알려주는 신호같은 거라서 그들과 만날 때면 ‘마치 그들이 내가 잘 일궈놓은 땅을 마구 헤집고, 파내고 가버리는 것 같은 느낌’만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흙을 또 조용히 덮거나 패 내어진 부분을 그대로 두는 것은 또다시 내 몫이고,

이제 그 짓에 지쳐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게 요즘의 나다.

 

다들 이렇게 사나,

내가 이제야 알았나.

 

 

04.

"부모님의 역할을 모르고 자란 게 00 씨 문제네요."

 

부모님이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 거예요? 하고 내가 물었었다.

선생님이 내가 하는 말마다 그건 부모님의 역할이에요, 하고 말씀하시길래.

(대화 흐름상 부모님이라고 표기합니다.)

 

음- 근래 부쩍 우울할 때면

엄마를 찾게 된다.

 

엄마,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예전에는 왜 나를 낳았냐고 물었는데,

요즘에는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묻는다.

나는 이게 그나마 좀 나아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엄마가 직접 들으면 어떨지 모르겠다.

 

부모님은 어디까지 해줘야 하나요?

나는 어디까지 놓을 수 있을까요,

 

 

05.

크리스마스다.

예수는 좋겠다.

온 세상 사람들이 생일을 축하해주네.

 

 

06.

중학교 때였나,

생일인데도 학교를 갔던 기이한 때였다.

보통 1월 5일은 방학인데.

 

그 전날 11시부터 나는 핸드폰을 꺼뒀었다.

아무한테도 축하 메시지가 안 올 것 같았거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교에 가니까 몇몇이 축하 문자 못 봤냐고 말을 건네주더라.

아, 꺼놔서 못 봤어. 하고 솔직히 이야기했더니

다들 갸웃해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 생일이 싫다.

이제는 왜 싫어졌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아마 어릴 적에 몰래 핸드폰으로 만화를 봤었는데 그 청구서가 내 생일날에 날아와서 그랬던 것 같다.

20만 원이 훌쩍 넘어갔었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다 망신을 당했던 기억이... 나네.

 

그때도 오덕구 였구나.

 

그다음 해부터는 아, 작년에 이런 일 있었는데 올해도 꼬이는 거 아냐? 했더니 진짜 꼬이더라.

그다음 해에도 아, 재작년이랑 작년에 이랬는데 올해도 꼬이는 건 아니겠지. 했더니 진짜 꼬이고.

 

생일이란 게, 참 신기하다.

평소의 나라면 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길 수 있는 것들인데

그 날엔 나에게 면죄부라도 준 것 마냥

죄다 눈물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것들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번 생일은 또 어떤 기분으로 맞아야 하나

 

그냥 날짜를 잊고 지내자.

그게 나도 속편하지.

 

 

07.

다들 눈은 봤나,

나는 엊그저께 겨우 눈을 봤다.

 

겨울은 싫어하지만

눈은 좋아한다.

 

눈이 올 때면

새벽부터 집 앞의 눈을 치우던 소리, 아빠의 발소리,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쌓인 눈을 견디지 못해 푸스슥, 하고 떨어져 내리던 소리,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던 엄마의 목소리,
창에 맺혀있던 물방울들.

 

소복이 쌓인 눈을 보겠다고 눈도 채 뜨지 못하고 문을 열면

찬 겨울의 냄새가 코 끝을 돌고,

그렇게 가만히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

세상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몇 안 되는 어릴 적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데,

눈이 오면 옛날에 살던 집의 풍경이 유독 생각난다.

 

삶의 여유가 생기면 다시 그런 시골에 가고 싶다.

아주아주 먼 미래겠지만 말이다.

 

펑펑 하얀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너무 지독히 내리진 말고.

 

그냥, 겨울 냄새가 느껴지리만큼만.

 

 

08.

분명 저번 글에서 자주 써야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속상하네.

 

글을 쓰는 지금은 크리스마스이브 오전 3시 51분

메리 크리스마스!

 

티스토리 앱이 바뀌었다.

구독하기도 훨씬 편해졌다. 다행이다.

앱이 구려서 못쓰고 있었는데... 다들 앱을 애용해 주십쇼.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엔 꼭 돌아오는 주기가 짧아지길.

자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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